Ⅲ. 친척, 이웃, 교우관계와 바람직한 삶 - 1. 친척윤리와 노인공경 (2) 친척 문화와 친척윤리
(교과서 144~149)
"무릇
족보란 반드시 그 친하고 친하지 않은 것을 분별해서 은혜와
정을 두텁게 하여 윤리를 밝히는 것이다." -
○ ○ 씨 성화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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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가문 정려(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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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과 족보]
1.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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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가문 가묘(家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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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문과 가정의 종교적 기능
○ 가정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신주(위패)를 모셔 놓고 종교적 의례를 행함
○ 조상의 신주는 조상에서 자손에게 이르는 가통과 가문을 상징
○ 가문과 가통을 통해 영원한 삶을 추구함
○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함
(2) 가문의 의의
○ 가문의 종류
- 당내간 : 8촌 이내의 동성 친척
- 종인 또는 일가 : 8촌을 넘어선 동성의 친척
○ 전통 사회에서 가문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 →가문의 번영을 중시함
○ 다수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해야 훌륭한 가문이 됨
(3) 가문의 훌륭함을 드러내는 방법
○ 국가 : 효자나 충신을 기념하는 정려(旌閭)를 세워 줌
○ 가문 : 조상의 문집과 족보 간행, 재실, 서재 등 건립
2. 족보
(1) 족보는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임
(2) 족보와 항렬
○ 항렬은 동일한 세대의 이름에 공통성을 부여함 →가문내에서 세대의 높고 낮음을 정하는 기준임
○ 처음에는 가까운 관계에서만 사용하다가 먼 친척으로 확대됨
○ 오늘날에는 대동보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항렬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
(3) 족보 문화의 폐해
○ 조선 후기에 가문들 간의 위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족보 간행이 성행함 →전국적인 대동보가 편찬됨
○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족보를 위조하거나 매수하는 일이 생김
(4) 족보 문화의 공헌 : 친척간의 결속력 강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계통을 따질수 있는 민족임

[친척 윤리]
친척간의 세대(世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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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척 윤리의 중요성
(1) 친척간의 유대
(2) 친척간의 질서
○ 친소와 세대가 질서의 기준임
- 친소(親疎) : 혈연의 가깝고 먼 관계
- 세대(世代) : 항렬의 높고 낮은 관계
○ 형제(2촌)와 종형제(4촌)는 세대는 같으나 친소가 다름
○ 조부(2대)와 형(2촌)은 친소는 같으나
세대가 다름
○ 형과 동생은 친소와 세대가 같으나, 출생의 선후가 다름
2.친척 윤리의 변화
(1) 조선 초기의 친척 윤리
○ 아들과 딸, 장자와 차자 등을 크게 차별하지 않음
- 자녀들이 부모의 제사를 돌아가며 지냄
- 딸의 집에서 아들 형제들이 제사를 지냄
○ 친손과 외손을 크게 차별하지 않음
- 외손봉사가 행해졌음
- 남자가 결혼 후 장기간 처가에 머물러 살기도 함
- 자녀들이 아동기를 외가에서 보내는 일이 많음
(2) 조선 중기 이후
○ 종법의식이 강화, 사대봉사가 일반화됨
○ 남자가 결혼 후 처가에 머무르는 기간이 줄어듦
○ 외가와 처가와의 관계가 점차 멀어짐
-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
○ 남자가 장가 가고 여자가 시집 가는 풍습에서 오로지 여자가 시댁에 시집 가는 풍습으로 바뀜
○ 외손봉사를 꺼리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동성의 남자를 양자로 삼음

[현대 사회와 친척 문화]
1. 조선 시대의 친척 문화
(1) 친척 공동체의 형성
(2) 동성불혼의 원칙이 유지됨 →동성이본사이의 결혼도 꺼리게 됨
(3) 가묘와 문중을 중심으로 생활함
(4) 동성의 친척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동족 부락이 증가함
(5) 낮은 인구 증가율로 친척 규모가 크게 증가하지는 않음
2. 친척 문화의 변화
(1) 1960년대까지
○ 생활 수준의 향상에 따라 인구 증가율이 놓아짐
○ 자녀의 수가 5~6명, 4촌의 수가 수십 명에 이르게 됨
○ 직계 가족이 일반화됨
(2) 1970년대 이후
○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친척의 규모가 축소됨
○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동족 부락이 줄어듦
○ 친척간의 교류 감소로 친척 문화가 날로 위축됨
3. 오늘날의 친척 문화
(1) 친척 문화의 위축
(2)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친지를 더 중요히 여김
(3) 친척 문화의 위치
보충읽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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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 받도록 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이나 정려각, 정려비를 세워 기리던 일.
정문을 홍문(紅門), 홍살문이라도 함
- 홍살문
: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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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문의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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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현판]-(충무공
조카 강민공 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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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현충사 입구에 있는 이순신
장군 집안의 정려각은 네분의
충신과 한분의 효자를 표창하는
액자가 걸려있다. 충무공
이순신, 조카 강민공 이완,
4대손 충숙공 이홍무, 5대손
충민공 이봉상, 8대손 이제빈
효자의 행실을 액자에 적어
널리 알리고 있다.
- (우)
충무공의 조카 이완의 정려:
완은 임진왜란(1592년)때에
충무공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란이 끝난
다음해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1627년)
때 청군에게 패하자 몸을
불 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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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입구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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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려문 : 당월패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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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중국 당월패방군(棠越牌坊群)
: 당월패방군은 대대로 포씨(鮑氏)가 모여 사는데 이들은 안휘성 신안 상인으로서, 18세기에
이르러 이 가문 출신의 포지도(鮑志道)와 그의 아들 포수방(鮑漱芳)이 소금상으로 거금을 벌어들인 뒤, 이 재산을 바탕으로 장강과 회하의 제방을
축조하였다. 또한 건륭제가 강남을 여행할 적에 그 비용을 전부 부담하여 그 공으로 우리 나라의 충신,
효자를 표창하는 정려문과
같은 패방을 하사받아 건립하였다.
포씨 가문의 영예를 보여주는 7개의
패방은 명대(明代)의 것 3개, 청대(淸代)의 것이 4개인데 '충, 효, 절, 의, 절, 효,
충'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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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가문의 가묘] |
- 가묘(사당)
: 사우(祠宇). 영묘(靈廟)와 동의어. 조선시대 주택 안에 세워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祠堂). 가묘의 성립은 고려(高麗)
말기 정몽주(鄭夢周)가 향교를
신설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묘(家廟)를 세우게 한 데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주택에서는 가묘를 따로 건축하였으나,
서민은 대청에서 제사 때에만 신위(神位)를 모셨고, 중인 주택 일부에서는 제실(祭室)로 사당을 삼았다. 물론 양반주택에서는 따로 사당을
건축하였다. 가묘[祠堂(사당)]는 주택 내의 가장 안쪽으로 따로 담장을 둘러싼 곳에 건축한다. 사당의 정문은 일각대문이나 삼문으로 건축하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또는 1칸 반의 직사각형 평면으로 단층맞배집으로 건축된다. 건축양식은 민도리집 양식과 익공 양식 2가지로
대별되며, 정면 3칸 모두에는 창호를 달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처리된다. 내부 북벽 앞으로 단을 쌓고 서쪽으로부터 고조고비의 제1감(龕),
다음 증조고비의 제2감, 다음 조고비의 제3감, 끝으로 고비의 제4감을 설치한다. 감 밖으로는 장(帳)을 드리우고, 각 위(位)마다 탁자를 놓고
최존위(最尊位) 앞에 향탁(香卓)을 놓되 그 위에 놓는 향로(香爐)는 서쪽, 향합(香盒)은 동쪽으로 향하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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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의 사당, 상덕사] (보물 제211호) |
- 서원의
사당 : 서원은 오늘날의
공교육기관인 관학이 입시중심의 과거(過擧)에만
집착하여 교육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였을 때, 참교육하자는 지방의 뜻깊은 선비들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었던 지방 사설 교육기관이다. 서원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원은 교육적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더 강화되었다. 특히 문중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고 조상 중에서
학덕보다는 충절로 이름 높은 선현을 배향하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 본래적 기능이 변질되어갔다. 그래서 서원 영역은 앞의
공부하는 강당영역과 뒤의 선현을 배향하는 사당영역으로 크게 구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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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대성전] (보물 제141호) |
- 향교,
성균관의 사당 - 대성전 : 향교는 고려·조선 때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며,
태학(太學)이라도 불리는 성균관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
향교와 성균관은 공자(孔子)와 선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해 마련된 대성전(大成殿)·동무·서무 등 문묘,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숙하는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가 기본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제례와 교육의
두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성균관의
사당인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位牌)를 중앙에 모시고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 4성(四聖)을
좌우에 모신다. 한국에서는 위의 5성(五聖)과 더불어 민손(閔損)·염경·염옹·재여(宰予) 등의 10철(十哲)의 위패와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정몽주(鄭夢周)·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안유(安裕) 등의 18현(十八賢)의 위패, 송나라의
6현(六賢)의 위패를 함께 모신다.
- 기타
사당 : 충신 열사를 기념하려고 세운 사당.
예컨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아산의 현충사, 충장공 권율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추모하는 고양 행주산성의
충장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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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 이순신 장군 사당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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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 권율장군 사당-고양 행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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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宗廟) :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
종묘는 원래 정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궁궐의 위치가 결정됨에 따라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여 1394년(태조 3)에 착공, 이듬해 완공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19위의 왕과 30위의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양식은 정전과 영녕전 모두 2익공(二翼工)의 맞배지붕으로 간소하며 종묘로서의 기능에 잘
부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궁궐 형성과 근세 왕도(王都)의 도시계획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하였다. 사적 제125호.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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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정전 (사적 제125호)] |
- 직계가족
: 장자를 중심으로 3대 이상이 함께 생활하는 가족을 의미한다. 직계가족은 결혼한 형제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과는 차이가 있다.
1960년대까지는 직계가족을 흔히 볼 수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점차 줄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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