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도자기
조각'을 일컫는 순 우리말. [목차] 2. 목이는 도공 민 영감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3. 나무하고 진흙 퍼오는 일은 힘들지만 보람치기만 하다 4. 진흙 거르는 기술을 배우며 민 영감에 대해서 점차 알아가는데… 5. 목이는 또 다른 도공 강 영감의 비밀을 알게 된다 6. 왕실 감도관이 왕실 일을 해 줄 솜씨 좋은 도공을 찾는다 7. 민 영감은 평생 소원을 위해 정성을 다해 도자기를 빚는다 8. 목이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꿈을 민 영감에게 말하지만… 9. 민 영감의 희망을 싣고 목이는 머나먼 길을 떠난다 10. 하루에 마을 하나씩, 고개 하나씩 넘는 목이, 여우를 만난다 11. 낙화암에 이른 목이에겐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12. 고려의 서울, 송도에 도착한 목이는 궁궐을 찾아간다 13. 줄포에 도착한 목이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닫기>
날실[經,경]-피륙(옷감이 될 만한,
필로 된 베, 무명, 비단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따위에서
세로로 놓인 실이다.
1986년 대표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맥도널드 햄버거의 로마 진출에 반발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1989년 프랑스에서 '슬로푸드선언문'을 발표하여 '속도'가 가정과 사생활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진단하고, '빠른 생활(fast life)'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닫기> 2.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63).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 출생.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아버지의 해외근무를 따라 제2차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을 시찰하고 졸업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로 정리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기습 후 해군에 지원, 솔로몬난바다해전에서 지휘하던 어뢰정이 격침될 때 중상 입은 부하를 구해 영웅이 되었다. 전쟁 후 통신사 기자를 거쳐 1946년 매사추세츠주 제11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 현직의 H.C. 로지를 물리치고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하였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등뼈의 악화로 입원해 요양하던 중 《용기있는 사람들》을 저술하여 195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6년 민주당대회에서 부통령후보를 겨냥하였으나 패하고, 1958년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후보지명을 받았다. 아이젠하워시대의 침체를 타파할 참신한 후보로서 <뉴프론티어>의 슬로건을 내걸고 공화당 R.M. 닉슨 후보와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우위에 올라, 격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사상 최연소(43세)대통령이고, 최초의 가톨릭교도 대통령이었다. 1961년 1월 취임연설에서는 미국의 전진을 호소하고,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을 부르짖었다. 웅변과 재기에 뛰어나 기자회견 등에서 텔레비전을 교묘히 이용해 이미지를 심는 정치를 하였고,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베스트 앤드 브라이티스트>라 총칭되는 많은 지식인을 각료로 포섭하였으나 화려한 슬로건에 비해 의회와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고 내정에서도 그다지 업적이 없었다. 외교면에서는 취임하자 곧 쿠바침공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빈 수뇌회담에서 옛 소련의 최고지도자 N.S. 흐루시초프에게 얕잡히는 등 순조롭지 못한 출발을 하였으나, <평화봉사단>을 창설해 국민의 봉사정신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결부시킨 일은 환호를 받았다. 1962년 10월 쿠바미사일위기 때 핵전쟁 위험을 무릅쓴 해상봉쇄에서 흐루시초프와 대결, 쿠바불침략 공약과의 교환조건으로 미사일·폭격기 철수를 수락받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험으로, 1963년 6월 아메리칸대학 졸업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전략>을 제창하여 7월 미·영·소 3국간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인종문제, 중국과의 국교회복 등 현안문제를 남겨둔 채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저격당해 죽었다. 불과 1000일의 임기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높였으나 베트남전쟁 개입의 책임 등을 둘러싸고 그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야후백과에서) <닫기>
'비단에 수놓은 것과 같은 강산'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자연, 즉 우리나라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닫기> 도산십이곡 - 조선 명종(명종) 때 이황(이황)이 지은 연시조이다. 고산구곡가 - 문장의 한 체(體). 기는 사리에 맞는 기술에 중점을 둔 문체이다. 이 명칭의 원류로서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와 《예기(禮記)》의 <학기(學記)> <악기(樂記)> 등이 있고, 그 뒤 한대(漢代)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양웅(楊雄)의 《촉기(蜀記)》, 육조시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등이 유명하다. 당대(唐代) 중반 무렵인 8∼9세기에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등에 의해 즐겨 쓰였고, 의식적으로 이 문체가 확립되었다. 기의 주요 제재
기원전 268년에 곡부(曲阜)의 공빈(孔斌,공자의 자손이라 전함)이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쓰여있다. 1902년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개창한 종교.
그에 의해 저술된〈대순전경 大巡典經>이
증산교의 경전이다. 이 종교는 교조의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분파된 종단들을 통칭하여 창시자의
호를 따서 증산교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흠치교( 1916년 4월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이 창시한 불교 계통의 신종교. 전라남도 영광 태생의 소태산은 소년시절부터 구도생활을 시작하여 26세 때인 1916년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원불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원불교의 기본교리는 우주와 인생의 근본질서를 일원상(一圓相)이라 하고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4은4요(四恩四要)의 신앙과 3학8조(三學八條)의 수행으로 원만한 인격과 광대무량한 낙원세계 건설을 최고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다.
① 태허성(太虛性) : 일원상 진리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텅빈 속성으로 존재한다. 이 태허성은 다시 유일(唯一)·평등(平等)·명징(明澄)의
범주를 갖는다. 자연환경과 사람의 길흉화복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전통적 지리 이론. 기본 논리는 일정한 경로를 따라 땅속에 돌아다니는 생기(生氣)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하자는 것으로, 도성·절·집·무덤 등을 만드는 데 있어 지상(地相)을 판단하는 이론이다. 풍수지리는 산·수(水)·방위(方位)·사람 등 4가지 요소를 조합하여 구성하며, 《주역(周易)》을 주요한 준거로 삼아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논리로 체계화하였으며 지리·지술(地術) 또는 감여(甘輿;甘은 天道, 輿는 地道)라고도 한다.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풍수가·지리가·감여가·음양가·지관(地官)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의 역사 풍수라는 용어는 중국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쓴 《장경(葬經)》에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하여야 하는데… 그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
그래서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법술을 풍수라 일컫게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생산력·보육력을 가지는 것과 같이 땅도 만물을 화생(化生)시키는 능동적 활력을 지녔다는 지모사상(地母思想)은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이러한 사상은 전국시대 말기 음양오행론이나 참위설(讖緯設) 등과 결합, 구체적인 풍수지리 이론이 되었고 한(漢)나라 때는 도교(道敎)의 성립과
더불어 더욱 체계화되었다. 남북조시대에서는 한층 발전하여 여러 대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 뒤에도 수많은 풍수가와 풍수서가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자생적인 지리사상이 형성되어 왔는데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발달된 이론체계가 전래된 이래 고유의 풍속 등과 결합, 중국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시대말 도선(道詵)은 본격적으로 당(唐)나라의 이론을 수용하는 한편 한반도에 관계된 독자적인 이론을 개척하였다.
도선과 그의 제자들은 한반도 지형이 경동지괴라는 것을 파악하였으며, 도읍지가 동남쪽으로 치우친 경주(慶州)보다는 중부지방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제시하였으며 특히 도선은 비보사상(裨補思想)을 주창, 수동적으로 지세(地勢)에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 가산(假山)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는
방법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세와 조화해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땅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한국 풍수사상의 고유한 특성이 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계승되었고 고려 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가 조정과 민간에서도 널리 보급되었는데 태조 왕건(王建)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사찰입지에 관한 제1조 및 서경(西京;평양)을 귀하게 여기라는 등의 4개 조목이 풍수지리에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다.
도읍지였던 개경(開京;개성)의 경우 장풍득수(藏風得水;바람을 막아 생기의 원동력인 水氣를 축적하는 것)의 형국인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으로
여겨졌는데 국면이 좁고 물이 중앙으로 모이는 단점이 있다 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워 비보하였다. 무신정권시기에는 이러한 비보문제를 전담하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한편 묘청(妙淸)의 난 등 고려시대 여러 변란에도 풍수사상이 강력하게 반영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당시 민중들의 사고 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지리설을 고려하여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신생왕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이 확립되면서 효(孝)가 강조되어 묘터를 잡는 음택풍수(陰宅風水)가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문물이
안정되기 시작한 중기 이후 극심해져 풍수지리는 개인과 가문의 부귀를 얻기 위한 터잡기 잡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풍수지리의 이기적인
적용현상은 후기 실학자들로부터 망국의 표본이라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나 민중의 개혁적 정서가 표출된 여러 민란,
동학농민운동 등에 정신적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침략과 함께 서양 지리학이 도입된 뒤 풍수지리는 미신으로 여겨진 채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기적 풍수의 저속한 옛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근래 전통사상 전반에 걸친 관심과 함께 풍수지리의
긍정적인 면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풍수지리의 이론 풍수지리는 사람이
자연에 적응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체계화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사람이 땅과 어떻게 잘 조화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땅과 살아
있는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경우까지 매우 중요시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의 본질적 측면인 생기(生氣)와
감응(感應)에 잘 나타난다. 이 논리에 의하면 땅 속에는 일정한 경로로 지기(地氣)가 흐르는데 사람은 이러한 땅의 생기 위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기운을 얻는다. 반면 죽은 사람은 땅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며 이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얻는 생기는 산 사람이 얻는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하며
이것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 한다. 따라서 땅속의 시신이 길기(吉氣)에
감응하면 그 자손이 복을 누리고 그렇지 못하면 자손은 쇠미하게 된다. 이같은 기본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풍수지리는 크게 도읍이나 군·현 또는
마을의 터를 잡는 양기풍수(陽氣風水), 집 등의 터를 잡는 양택풍수(陽宅風水), 묘터를 잡는 음택풍수 3가지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지세가 넓고
좁은 차이에 따른 구분일 뿐 명당의 조건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명당을 찾는 데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형국론(形局論)·간룡법(看龍法)·장풍법(藏風法)·정혈법(定穴法)·득수법(得水法)·좌향론(坐向論)·소주길흉론(所主吉凶論) 등의 원리가 적용된다.
이와 같은 7가지 원리는 편의상 분류일 뿐 실제 지세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모두 종합, 적용되며 세부적인 법술들이 많이 이용된다.
형국론 지세의 겉모습을
사람·사물·짐승 등의 모습으로 풀이하거나 유추하여 그 형상에 상응하는 기운과 기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간룡법 풍수지리의 모든
원리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산을 용으로 보고 그 산맥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잘 달려왔는가를 보는 것으로, 조산(祖山)에서 주산(主山)을 거쳐
혈장(穴場)에 이르는 맥의 연결이 생기발랄한가를 살피는 것이다. 장풍법 명당 주변의 지세를
살피는 것으로서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전주작(前朱雀)·후현무(後玄武)의 사신수(四神獸)구조로 보는데 혈이 남향인 경우 동쪽이 청룡,
서쪽이 백호, 남쪽이 주작, 북쪽이 현무가 된다. 현무는 주산(主山;임금산)으로 국면의 기준이 되는데 혈장 뒤에 약간 떨어져 솟아 있는 높고 큰
산이다. 주작은 조산(朝山;신하산)과 안산(案山)으로 나누어지는데, 조산은 임금인 주산에 대하여 신하와 같은 산으로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듯한
모양이어야 한다. 안산은 주산과 조산 사이에 책상과 같이 낮게 솟아 있는 산이다. 청룡과 백호는 각각 동과 서에서 주산과 조산을 호위하는 자세를
취하는 산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신사구조는 남향인 서울의 경우, 북현무는 주산인 북악산(北岳山)으로 이 산은 조산(祖山)인 북한산(北漢山)에서
맥을 이어받아 혈장인 경북궁 뒤에 솟아 있는 서울의 얼굴에 해당한다. 남주작은 조산인 관악산(冠岳山)이고 안산은 남산(南山)인데 관악산이
조산으로서는 다소 기가 센 단점이 있다. 청룡은 낙산(駱山)이며 인왕산(仁王山)이 백호에 해당된다. 장풍법을 통해 명당의 크기가 파악되는데
사신사구조가 만드는 넓이가 크면 양기풍수의 터가 되고 좁으면 음택 등의 입지가 된다. 정혈법 간룡법과 장풍법으로
대략적인 명당의 범위가 파악되면 정혈법을 통해 혈을 확정한다. 혈이란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지점으로 양택이면 도읍이나 마을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입지하게 되며 음택일 경우 시신을 매장하는 광중(壙中)이 된다. 진혈(眞穴)을 잡지 못하면 생기의 조응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명당의
가치가 상실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혈은 매우 정확해야 한다. 득수법 물의 흐름을 살피는
것으로 한국보다 특히 중국에서 중요시되었는데 이는 풍수지리가 흥성하던 중국 북부지방의 강수량이 적은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물은 길한 방위로부터
들어와 흉한 방위로 나가야 하는데 혈전(穴前)에 공손히 절을 올리듯 유장하게 지나가야 하며 산의 흐름과 조화를 갖추어야 한다.
좌향론 입지할 건축물 등의
성격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향을 결정하는 것으로서 원래 좌향이란 혈에서 본 방위, 즉 혈의 뒤쪽 방위를 좌로 하고 혈의 정면을 향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좌향은 지기와 천기의 조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소주길흉론 주로 땅을 쓸
사람에게 관계되는 논리로, 덕을 쌓은 사람에게 길지가 돌아간다거나 땅 주인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바와 같이 땅을 쓸 사람과 땅의 오행이 서로
상생관계(相生關係)인가를 파악하는 것으로 택일(擇日)문제 등도 포함된다. 풍수지리의 현대적 평가 풍수지리는 그 설명방식이 은유적·비유적이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엄밀한 서술양식과 비교하면 매우 소박해 보인다. 그러나 땅과 자연의 이치를 포괄하여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균형 측면에서 볼 때 생태학과 같은 현대과학에도 잘 부합된다. 이것은 풍수지리의 근본적인 논리가 땅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양자의 조화로운 존속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땅의 해석에 동원되는 모든 이론체계는 자연의 순환을 체계적으로 논리화한 음양오행의 이치를 토대로 조화와 균형을 가장 핵심으로 하고 있다. 현대 지리학과 건축학 분야에서도 취락입지·집터잡기·대지(垈地) 내의 건물배치 등에 관한 풍수지리의 논리가 땅과의 유기적 관련성을 고려한 매우 합리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자연과의 유기적 연관을 강조하는 전통사상이 환경문제 등을 낳은 현대과학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한편 풍수지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첫째 풍수지리만이 전통 지리학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늘날 이 이론이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현상도 한민족의 땅에 대한 강한 집착이 반영된 것으로서 전반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둘째 이론적으로 길지(吉地)로 꼽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 등 풍수를 모르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을 기본으로 이것을 확대, 적용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순점이 많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객관적이기 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견해도 제시되어 왔다. 이와 같이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는 것은 풍수지리가 여러 사상과 풍속을 수용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발전되어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땅속을 흐른다는 기가 아직 명쾌하게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 (야후백과에서) <닫기>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 등의 5요소의 변전(變轉)으로 만물의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이론. 오행설은 음양(陰陽)의 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까닭에 흔히 음양오행설로 불린다. 오행설은 음양이론과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 고대문헌에서 최초로 오행설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상서 尙書〉의 홍범(洪範)으로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첫번째가 바로 오행이며 그 순서는 수·화·목·금·토로 되어 있다. 이러한 5가지 요소는 이른바 민용오재(民用五財)라는 것으로, 고대인의 생할에 불가결했던 5가지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순서도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긴요한 물과 불에서 시작해서 생활자재인 나무와 쇠붙이를 거쳐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흙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예기 禮記〉의 월령(月令)에 나타난 목·화·토·금·수의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순서나,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정한 토·목·금·화·수의 오행상승(五行相勝)의 순서로 변모된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추연은 처음으로 오행설을 체계화시킨 사람으로서, 그는 중국 역대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행상승의 순서를 정립시켰으며, 오행의 덕(德)을 제나라에 부여했다. 즉 "목은 토를 이기고, 금은 목을 이기며, 화는 금을 이기고, 수는 화를 이기며, 토는 수를 이긴다"는 것을, 우(虞)는 토덕을, 하(夏)는 목덕을, 은(殷)은 금덕을, 주(周)는 화덕을 입었다고 해석하고, 나머지 수덕을 제나라에 결부시킨 것이다. 한편 오행상생의 순서는 한(漢)나라초에 복생(伏生)이 체계화시켜 그를 통해 왕조의 변화나 만물의 운동과정을 설명했는데, 한대에 이르러서는 음양설과 결합된 음양오행설이 크게 유행하여 오행을 우주조화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일상적인 인사(人事)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목은 육성(育成)의 덕을 맡는다 하여 동쪽에 위치하고 계절은 봄이며, 화는 변화의 덕으로서 방위는 남쪽이고 계절은 여름, 토는 생성(生成)의 덕으로 방위는 중앙에 4계절의 주(主)이며, 금은 형금(形禁)의 덕으로 방위는 서쪽이고 계절은 가을, 수는 임양(任養)의 덕으로 방위는 북쪽이고 계절은 겨울이라고 했다. 또한 오행의 관계에는 상생과 상극(相剋)의 관계가 있어 상생은 목생화·화생토·토생금·금생수·수생목이며, 순서는 목화토금수이다. 또 상극은 수극화·화극금·금극목·목극토·토극수이며, 순서는 수화금목토라고 했다. 이렇게 오행설은 선진(先秦)시대에 성립된 뒤 한대에 이르러 체계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는데, 이무렵에는 음양설 및 십간(十干)·십이지(十二支) 등과 결합되어 그 내용이 복잡하게 되었다. 특히 참위(讖緯) 또는 도참(圖讖)이라 하는 것이 오행설과 결부되어 한층 더 오행설을 복잡화·신비화시키게 되었다(→ 참위설). 참위란 6경(六經)의 숨은 뜻을 신비한 내용으로 해석하여 왕조의 흥망이나 인간의 운세(運世) 따위를 예언하는 것을 일컫는다. 참위와 결부된 오행설은 중국에서는 한대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해서 당나라 때 이르러 전성기를 맞게 되었는데, 한국에 오행설이 도입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한국에 오행설이 전래된 것은 한사군 무렵부터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삼국시대의 유적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강서대묘에서 볼 수 있는 현무(玄武)의 모습은 이미 이 시기에 청룡·백호·주작·현무와 같은 5행설의 사방위체계가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 5부5방제(五部五方制)와 같은 정치체제의 편제 역시 그러한 영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三國史記〉백제본기에는 의자왕 20년(660년) 땅속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초생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라는 참구(讖句)가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참위설과 결부된 오행설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행설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 신라의 경우도 〈삼국유사〉에 나타난 〈만파식적설화(萬波息笛說話)〉나 태종무열왕비에 나타난 귀부(龜趺)에 비신(碑身)을 세운 것 등에서 보여주듯이 오행설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도교(道敎)와 역학(易學)·민간신앙 등이 결부되어 사주궁합(四柱宮合)에서부터 점복(占卜)과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비롯하여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행속성 귀류표]
조선 중기 문신·성리학자.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이다.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황(李滉)과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5년(중종 10) 학행으로 천거받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공조좌랑·홍문관부수찬·교리·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중 박원종(朴元宗)·김안로(金安老) 등 반정(反正) 공신들이 주장한 왕비 신씨(愼氏) 폐출론에 반대하는 한편,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1517년 경연시독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면서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시를 주창, 8도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다. 1518년 부제학으로 있을 당시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청(奏請)하여,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1월 대사헌에 승진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등 소장학자들을 선발,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1519년(중종 14)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훈구파인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道學精神)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이이(李珥) 등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楊州)의 도봉서원(道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야후백과에서)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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