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윤리사상의 전개 - 근대 사상' 색인
조선 후기 이학(理學;성리학)과 예학(禮學)으로 대표된 당시의 전통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선각적으로 일어난 근대의식과 민족적 자각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에 치우쳐 있던 성리학에 대한 반동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표방하며, 실생활의 이익을 목표로 정치· 경제· 언어· 지리· 천문· 금석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실학은 그 주장하는 내용과 시대에 따라
이익(李瀷)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治用派)로서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을 주장하는 학파,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로서 상공업의 유통, 생산 기구
등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형성된 실사구시파로 경서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19세기
초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실학은 주자학의 전통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개혁론을 주장하여,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함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닫기>
성리학에서는 우주 자연과 인간이
합일(合一)할 수 있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물아 일체관(物我一體觀)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물아 이분관(物我二分觀)을 지니면서 물리적 자연관의 각성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우주 자연에 대립시키면서 그것을 도구화하려는
의식까지 보이고 있다.
물아 이분관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독립한 '독존적 존재'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독존적 인간관은 정약용이
우주의 기와 인간의 혈기를 엄격히 분간한 데서 잘 나타난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이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버리고 생명 있는 욕구체로서의 구체적인 자연인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성호 이익(星湖 李翼)은 인간을 기혈적(氣血的) 존재로
본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도 인간의 성을 기호(嗜好)로 설명, 인간을 실체의
생리적 욕구체로 파악한다. 인간은 자연 앞에 독존하는 자율적 인격의 주체로서
평등하게 욕구를 실현하며 충족시켜 가는 자연인의 상을 그린 것이 실학의 인간관이다. <닫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지식인들이 주장하였던 토지개혁론. 균전법은 중국 한나라에 기원을 두며
당나라 때까지 시행된 토지제도로, 국유를 원칙으로 한 공전제(公田制)였다. 그러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지주들의 농지 겸병으로 빚어진 농촌 피폐를 근본적으로 구제하기
위하여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개혁안으로 유형원(柳馨遠)의 균전론, 《응지진농서》에 나타난 정조
때의 농촌지식인들의 균전론, 이익(李瀷)의 한전론(限田論), 정약용(丁若鏞)의 정전론(井田論) 등이
있다.
<닫기>
토지의 균등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론.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토지를 일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근대사회에서의 토지는 국가경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고려
말기에서조선 말기까지 학자· 관료들에 의해 정전론(井田論)· 균전론(均田論) 등 토지개혁론이
대두되었다. 그 가운데 한전론은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무농· 빈농층을 자영농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겸병이 계속되고, 정부의 소극적인 정책으로 말미암아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닫기>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자(井字)로 구획하고 균등히 배분하여 농촌경제와 국가재정을
안정시킨다는 토지개혁론.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지주제의 확대와 관리들의 수탈에
따른 수취제도의 극심한 문란은 농민의 계층 분화를 심화시켜, 빈농이나 무전농민들이 발생하게
되고 국가재정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제반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개혁을
내세운 실학자들은 새로운 농업경영 방식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고, 특히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경제치용학파에서는 중농주의의 입장에서 토지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농업개혁에 치중함으로써 농촌경제를 되살리고, 신분제의 모순을 타파하여 경제개혁과 사회개혁을
병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의 지주· 전호제 자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을 제기한 탁월한 개혁안이었으나, 실제로 사전 매입을 위한 재정조달이나 전국의 토지를
일정한 규모로 구획하는 데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과 양반· 지주층의 반대 등으로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닫기>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중국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학문 방법론. 《후한서》
하간헌왕덕전에서 나온 말로, 대표적인 학자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주자학 경전 해석의 극복 등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실학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주자학의 체계를 극복하는 길을 공자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에서
찾고 그 방법으로 철저한 고증과 실증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학파의
요구들은 당시의 현실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실학파 가운데 경세치용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만 추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정희(金正喜)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학문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후 이 사상은 개화파에게 영향을 주면서
이어졌다. <닫기>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호는 다산(茶山).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나주. 광주 출신,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다. 178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합격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
공서파(功西波)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로 유배되었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크게 활약하였다.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유배되었고, 이후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잇는 실학(實學)의 중농주의 학풍을
계승하고,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들여 방대한
저서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또 시재에도 뛰어나 어릴 때부터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10년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고, 59년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로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다.
<닫기>
조선 말기에 정학(正學;正道)인 주자학(朱子學)을 지키고 사도(邪道)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 존왕양이(尊王壤夷)의 대의와 화이(華夷)사상을 기초로
송나라의 주자가 체계화한 척사론이 우리나라에서 등장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를
배척하면서부터이다. 또 조선 영· 정조 시대 이후에 천주교의 전래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위협받자
유학자들의 대응논리가 위정척사론이었다. 천주교의 유입은 조선 건국 이래로 국시가 되어온
유교와 유학에 한때 일대 위협이어서 위정척사는 서교(西敎;天主敎)를 배척하는 공서파(攻西派)의
큰 명분이 되었다. 또 반외세 민족의식의 형성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초기의 위정척사 운동은 이항로,
기정진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들인 유인석, 최익현(사진)
등에 계승되었다. 척사운동은 1860년대에는 서양의 통상 요구에 대응하여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어서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으로 나타나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를
강력히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유생들은 1870년대의 문화 개방을 전후해서,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조선 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
등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 하였다. 나아가 척사운동은 1890년대 이후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하), 교육부, 2000, p78)
위의 사진은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간파하고 왜적과 강화함이 불가(不可)하다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자신의 목을 쳐달라는 뜻에서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서 엎드려 상소([持斧伏闕斥和義疎])를
한 최익현의 영정이다. <닫기>
1860년(철종 11)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우리나라 고유의 신흥종교.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위기와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혼란 속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하였다.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천주교에 맞선 동학(東學)은 양반사회의 해체기에 농민
대중의 종교가 되면서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띠었고, 그 뒤 3· 1운동을 태동시킨
민족주의의 역량을 키우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뒤에 3세교주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닫기>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에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영부(靈符)와 주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중요하다고 여긴 13자 주문은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가 저절로 얻어지고, 하느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깨달아진다[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고 했다. 이말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실 수 있으며[侍天主],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하느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뜻을 길이길이 잊지 말라는 것으로 신비적 경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으로 부각되었다. 이것은
동양 고래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의 구체적인 생활 원리로써 박애성과 평등성의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
- 최제우 : 시천주(侍天主)
- 하느님을 모시라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
- 최시형 : 사인여천(事人如天)
- 사람을 하늘(하느님)같이 모시라
- 손병희 :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하느님)이다. <닫기>
조선 중기, 즉 19세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사상과 종교. 좁은 뜻으로는 천주교만을
의미하는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천문·
역법· 산학· 지리· 서양종교에 관한 책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을 각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유교와 상치되는 점이 많아 사교(邪敎)로 인정되어 탄압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66년 병인사옥(丙寅邪獄)에서는 많은 명사(名士)와 신도들이
처형되었다. <닫기>
동학의 창시자.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 초명은 복술(福述)· 제선(濟宣).
본관은 경주.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였고, 구도행각 10년 만에 울산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한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여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 동학을 창시하였다. 1862년 동학론을 집필하여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였다. 64년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사형당하였다.
저서로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닫기>
하느님을 내 마음속에 모신다는 뜻의 동학사상. 제1대 교주인 최제우(崔濟愚)의 종교체험에서 처음
등장하며, 시(侍)는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어 온 세상 사람들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을 아는 것이고, 주(主)는 존칭해서 부모처럼 섬긴다는 뜻이다. 시천주는 초월적인 의미와
내재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동학의 기본사상이었다.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제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는 인내천(人乃天)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닫기>
조선 말기 동학의 제2대 교주.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경주.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교, 63년 초대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 관에 여러 차례 청원하고 전봉준(全琫準)의
동학농민운동에 동조· 합세하였다가 98년 원주에서 체포,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닫기>
천도교의 종지(宗旨). 1905년 동학의 3대교주인 손병희(孫秉熙)가 동학을 천도교로 재편하면서
내세운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늘이라는 뜻이다.1905년경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에서 공식적으로 나타난다. 이 사상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이, 2대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사람을 하늘같이 섬긴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을 거쳐 새롭게 재해석된
것이다. <닫기>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자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본관은 밀양.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관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개입으로
실패하자 은신생활을 하였다. 1904년 개혁운동을 목표로 권동진(權東鎭) 등과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펼쳤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하였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학교를 인수·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진력하였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를 넘겨주고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체포되어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치료중 죽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닫기>
19세기 중엽 이후 중세적 봉건전통사회를 근대적 시민의식사회로 전환하게 한 지도이념 또는 그
인식체계. 1853~60년대부터 형성되어 발전한 자주근대화 및 변혁과 진보의 사상을 말하며, 그
내용은 실학사상의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화사상가로 손꼽히는 박규수(朴珪壽)는 실학사상을
인식한 인물로, 중국에 전래되어 있던 서양의 근대문명을 보고 ‘실(實)이 없는 학(學)은 있을 수
없다’는 실학론을 강조하였고, 대원군의 쇄국배외정책에 따른 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 이후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항을 강조하였다. 박규수의 영향을 받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84년 일으킨
갑신정변은 그들의 개화사상을 국가사회에 직접 응용해 보고자 한 구체적 표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에 이 개화사상은 96~98년 독립협회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후기
개화사상으로 볼 수 있는 독립협회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국민자유권사상· 국민평등권사상·
국민주권사상· 국민참정권사상의 정립과 발전이다.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였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성으로 인해 일부 도시민 청년층에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영향이 집권층에 수용되어 일부 제도개혁이 이루어졌고, 국권피탈 후
애국계몽사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닫기>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 개화당이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청(淸)에 의존하려는 민씨 중심의 세력을 물리치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
계획은 84년 12월 4일 우정국의 개국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하고, 연회 시초에 안국동 별궁에
방화하게 하여 척신들이 왕이 있는 궁궐로 급히 돌아갈 때에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화
계획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은 즉시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하고,
일본군의 호위를 청하여 경우궁(景祐宮)으로 국왕을 모셨다. 이어 궁으로 들어오는
윤태준(尹泰駿)· 민태호(閔台鎬) 등 사대당 일파를 살해하고, 다음날인
5일에 각국 공사· 영사들에게 신정권의 성립을 통고하였다. 그러나 이때
청국군이 출동하여 열세였던 일본군은 패퇴하고 정변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 인해 청·
일 양국의한국쟁탈전이 더욱 격화되었다. <닫기>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안동.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교리·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81년에 일본을 시찰하고, 이듬해에 다시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어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것을 결심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10여 년 동안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가, 94년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을 통해서 본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저서로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닫기>
조선 말기 정치가.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서울 출생.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고,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하였다. 94년 갑오경장 때 귀국하여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을 지냈다. 95년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이 되었으나
대신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한일합방 후
일본의 후작(侯爵) 작위를 받고 중추원(中樞院) 고문 및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닫기>
조선 말기의 문신. 서울 출생.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남양. 1869년경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지도를
받으며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등과
사귀었다. 1881년 일본에 다녀왔고, 83년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
미국에 다녀온 후 84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의 우의정이 되었으나 3일 만에
진압되고 청(淸)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94년 갑오개혁으로
신원되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닫기>
19세기 중엽 서구세력의 침투 속에서 등장하였던 서구문명의 수용논리. 우리나라에서는
동도서기론이라고 한 데 비하여 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이라고 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질서〔東道〕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 과학기술〔西器〕을 수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도(道)에 비중을 두었으므로
기존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또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사상은 노선과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통하여
국가독립을 확보함으로써 국내외의 위기를 타개하여 보려는 목표를 추구하였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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