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 도교 및 묵·명·법가 사상

memo1.gif도가 道家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사상. 전국시대에 일어나 유교사상과 함께 2,000년 동안 중국과 그 주변국에 영향을 미친 철학유파로, 도가사상은 도를 숭배하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포함하여 일컫기도 한다. 도가사상의 이론은 노자(老子)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즉, 만물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로부터 생성되므로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고 하여 모든 절대적 가치판단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이상적 삶은 도덕적 선악의 작위(作爲)를 떠나 자연에 순응하며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정치에 있어서도 모든 인위적 통치를 배격하고 무위자연의 도에 기초한 순박하고 평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2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청담사조(淸談思潮)를 유행시킨 도가사상은 11세기 들어 성리학자들이 도가의 정적주의와 무위사상을 호되게 비판하자 더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중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닫기>

memo1.gif도교 道敎

    신선사상을 기초로 하고, 도가사상· 불교· 유교 등을 수용하여 성립된 중국의 민간종교. BC 3세기경 중국에서 생긴 신선설에서 비롯되어 4세기 이후 종교체제가 갖추어졌다. 만인에 공통된 불로불사(不老不死)에의 소망에 도달하기 위한 각종 방술· 속신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도교의 전신은 진(秦)· 한(漢)의 신선방술(神仙方術)과 황로지학(黃老之學)이다. 최초의 교단은 후한의 순제(順帝) 때 장릉(張陵)이 창시한 오두미교(五斗米敎)와 영제(靈帝) 때 장각(張角)이 세운 태평도(太平道)이다. 오두미교는 뒤에 천사도(天師道)라고도 하였으며, 13세기부터는 정일교(正一敎)라고 불렀다. 4세기 진대(晋代)에 와서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의하여 체계화된 도교는 당(唐)의 도교신봉책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유교· 불교와 혼합된 민중도교가 전개되었다. 20세기 들어 중국 공산당의 종교정책으로 위축되었던 도교는 타이완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통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전래된 것은 624년(영류왕 7) 오두미교가 소개되면서부터이며,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唐)으로부터 《도덕경》 등을 들여오면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고구려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닫기>

memo1.gif도교의 인간관

    [인간의 본성과 동물과의 차이] : 유교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별하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특히, 맹자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금수(禽獸)와 인간이 다른 점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인간다움을 발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교에서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다른 점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천지 만물이 서로 통할 수 있으며, 같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자연계(自然界)와 인간계(人間界)의 밑바닥에는 보편적인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을 도(道)라고 하였다. 당시 '덕(德)'자는 '득(得)'자와 서로 통하여 쓰였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얻어진 것일까? 인간의 본성인 덕은 도로부터 얻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장자의 '마제편(馬蹄篇)'에서는 "대저 지덕(至德)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금수와 더불어 같이 거주하였으며 만물과 더불어 나란히 살았으니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았으리오. 만물과 똑같이 무지(無知)하되 그의 덕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똑같이 무욕(無慾)하였으니 이것을 소박(素樸)이라 한다. 소박하면 백성들의 본성이 얻어질 것이다. 후세에 성인이 힘들여 인을 행하고 자랑스럽게 의를 행하게 되자 천하 사람들이 비로소 의혹(疑惑)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무지 무욕하며 무인의(無仁義) 할수록 온전한 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성현이나 군자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도 덕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장자는 덕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어린아이 같다고 하였다.『장자』'경상초편(庚桑楚篇)'에서는 "어린아이가 종일 울어도 목소리가 쉬지 않으니 심기가 화순(和順)한 극치이다.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지치지 않으니 그의 순박함이 덕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종일 보아도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치우쳐 보지 않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결국 그의 덕이란 지식, 정감과도 관계가 없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과도 관계가 없다. 맹자에게는 인의(仁義)가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고 하지만 장자는 그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도가의 자연적 인간관과 이상적 인간상] : 도가는 당시 몰락한 주대(周代)의 문물이 지닌 허위성과 형식성을 직시하고 반문명적인 생각을 지니면서 나타났다. 주대 사상과 문물의 주축을 이루었던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을 형식화함으로써 인의예지는 인간의 천진한 자연성을 구속하는 질곡이 되었다. 그러므로 도가는 외적 형식과 가치 체계뿐만 아니라 그 근원으로서의 내적 도덕성에 대해서조차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그 출발에서부터 도가 사상은 인의예법(仁義禮法)을 논하는 사상과는 대립 충돌의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계는 공자와 노자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다. 공자가 젊었을 때 노자(老子)의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하러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자는 "양고심장약허(良賈深藏若虛)요, 군자성덕용모약우(君子盛德容貌若愚)라"고 한 다음, "그대에게는 교만과 욕심과 색용과 음심이 너무 많소. 그것은 그대에게 해로울 뿐이요. 나로서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소이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노자의 인상에 대해서 "새나 짐승은 아무리 날쌔어도 이 손으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龍)은 잡을 수가 없지. 노자라는 사람은 그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老莊사상의 주개념은 도(道)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한 自然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도는 인위 조작이 가해지기 이전의 본래 상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도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도의 기능과 일체화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천지 만물은 도를 공통의 근원으로 삼는다. 이 도는 자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도가의 인간관은 자연적 인간관이라 할 수 있다.
    장자는 학(學)과 사(思)에 의한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 학(學)과 사(思)로 치기명(致其明)이나 복기초(復其初)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유가와 다른 점이다. 장자서(莊子書)에서는 상아(喪我), 좌망(坐忘), 무기(無己) 등의 신비스러운 수양 방법이 자주 언급된다. 특히 좌망은 인의예악(仁義禮樂)의 관념을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몰입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수양 방법을 거쳐 덕과 간격이 없는 경지인 '천인합덕(天人合德)'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상적 인간을 성인(聖人), 지인(至人), 신인(神人)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逍遙自在, 順性, 順物自然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소요 자재는 어떤 外物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정신의 자유를 뜻한다. 순성은 본성인 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것을 말하며 素撲한 본성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순물 자연은 자기의 사심과 주관을 버리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닫기> 

memo1.gif무위 無爲

    노자가 주장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도가 사상은 공자의 유가 사상과는 달리 당시의 혼란한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노자는 춘추 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위자연의 사상을 내걸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 윤리를 비판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권에 대한 일반 백성의 저항권을 포함시키고 개인의 독립성을 옹호하였다. 그런데 제자 백가 사상 가운데서도 도가만은 현실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 특색을 지니고 있어 인도의 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양자강 유역에서 발전한 초나라의 이질적 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현실주의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노자는 도를 따르고 도를 지키는 것을 덕이라 하였다. 따라서, 덕은 도처럼 '무위(無爲)'여야만 한다. 무위는 유위(有爲), 또는 인위(人爲)의 반대이며 인간의 지적 오류에 의해 제정되고 실천되는 제도[禮]나 행위를 부정하는 개념이며,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아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자연이란 물리 세계의 자연이나 서양 철학의 자연주의도 아니다. 자연은 바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스스로 그러하고[自己如此],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정신의 독립이며,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이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이 무위자연이다. 노자가 "학문을 하면 날로 보태는 것이고, 도를 함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면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위는 인식의 오류로 말미암아 혼란해진 자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방법이며, 동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술이다.   <닫기>

memo1.gif황로학파 黃老學派

    전한 초기에 유행한 법가와 도가의 융합 사상이면서 중국의 정치사상 단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 새로운 정치사상을 정립하려는 시도로 등장하였다. 황로는 黃帝와 老子를 가리킨다. 황제는 중국 전설상의 제왕으로 법칙의 발견자, 법률의 제정자로서 상징화되어 법가적 사고를 대표하며, 노자는 도가의 시조로서 허심과 무위의 心術에 의해 세상에 대처함을 특징으로 한다. 한대 이전에는 황로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 말은 한대에 들어와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사상적 내용은 管子, 經法, 十大經, 稱, 道原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내면적 도덕인 道로부터 法이 생겨나며 도는 법을 초월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心을 움직이는 음악에는 법칙이 있어서 자연계의 객관적 법칙과 일치한다고 하여 心도 법칙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정치에 적용하여 그들은 법률에 사정을 두지 않는 공평한 재판관과, 법률이 갖추지 못한 점은 도에 의해 처리하는 융통성 있는 행정관을 이상적 관료로 여겼다. 그들의 사상에 따라 정사를 펴나갔던 인물은 한초의 曹參, 田叔 등이다. 또 당시 景帝의 모친인 寶太后가 황로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황로의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황로는 단순한 도가의 일파로 변모하고 그 내용도 변질되어 노자에게 가탁한 神仙說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세력을 떨쳤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도가의 일파로 전락하였고 사상의 내용도 상당 부분 변질되었다.   <닫기>

memo1.gif황제 黃帝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사람이다. 한족(漢族)의 시조로 되어 왔다. 문명을 발전시켰고 도교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의복· 문자 등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닫기>

memo1.gif삼황오제 三皇五帝  

    중국 고대 전설상의 8명의 제왕. 농업· 불· 문자· 목축 등의 발명자라고 한다. 씨족토템이나 직업기원 등의 설화를 주로 유가(儒家)가 정리한 것으로, 3황 5제는 원래 별개의 것인데 후한(後漢) 무렵 하나로 합쳐졌다. 3황(皇)과 5제(帝)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는 3황을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사기(史記)》 에서는 5제를 황제(黃帝)· 전욱()· 제곡()· 당요(唐堯)· 우순(虞舜)이라 하였다.    <닫기>

memo1.gif오두미도 五斗米道

    후한 말기에 일어났던 도교의 일파. 신자들에게 해마다 쌀 5두를 바치게 한 데서 오두미도라는 명칭이 생겼다. 교주의 칭호를 따서 '천사도(天師道)'라고도 한다. 2세기 초 후한 순제 때에 도교의 창시자이며 초대교주인 장릉(張陵)이 사천 학명산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 老子를 말함)으로부터 신출정일맹위(新出正一盟威)의 道를 전해 받아 창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아들인 張衡과 손자인 張魯에 의해서 교법과 교단 조직이 정비되었다. 노자를 교조로 받들고 「도덕경」을 주요 경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巫祝的인 것에 불과하던 교법이 장로에 와서는 점차 정비되었고 독자적인 교단 조직을 기반으로 해서 한중 일대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의 손자인 장로는 또한 후한 말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타고 일종의 종교 왕국을 수립하여 약 30년간에 걸쳐 독립을 유지하였다. 215년 조조에게 투항함으로서 정치적 독립은 상실하였으나 그 교법은 점차 동방으로 확대되어 육조 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도 침투하였다. 교법은 태평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하며 符水[符籍과 井華水] 등에 의한 주술적인 치병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과를 감시하고 상벌을 내리는 초월신을 상정하여 병의 원인은 모두 사람의 죄과 때문이므로 병자를 조용한 방에 가둬 죄과를 반성케 하고 복죄의 뜻을 기록한 문서 세통을 天, 地, 水의 신들에게 바치게 하였다. 한편 속죄를 위해 공공 작업에 근로 봉사를 하게 한 점은 신자들에게 노자를 학습시킨 점과 함께 오두미교가 단순한 주술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교단 조직은 엄격한 상하 위계가 있어 일종의 행정 조직으로도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 점에서 이 교는 정치 조직의 성격까지도 띠고 있어 농민들 사이에도 퍼져 농민 봉기의 구심력이 되기도 했다.  5세기 초 오두미도를 개조하여 북천사도와 남천사도가 세워졌고, 수(隋)· 당(唐)을 거치면서 남· 북의 천사도가 합쳐졌다. 그 후 여러 파와 점차 통합되어 정일도(正一道)로 불리었다. 우리나라는 7세기경 고구려에서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닫기> 

memo1.gif현학 玄學

    《노자》 《장자》 《주역》의 3현(三玄)의 고전에 의거하여 사상을 전개한 학문. 중국의 위진시대(魏晉時代;220~420)에 유행하였던 철학사조이다. 현학가들은 노장사상에 유가경전의 사상을 혼합하여 양한(兩漢)의 경학을 대체하였다. 대표적 학자로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유(有)는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무'를 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향수(向秀)와 곽상(郭象)은 이 관점에 반대하여 만물은 자생하며 독화(獨化)한다고 주장하였다. 배위()는 《숭유론(崇有論)》을 지어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봉건명교를 적극 옹호하였다. 동진시대 이후 현학은 쇠퇴해졌으나 경학과 불교에 미친 영향이 크다.    <닫기> 

memo1.gif청담 淸談 Pure conversations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탈속적인 논담. 역(易)· 노장사상(老莊思想)· 인물비평 등을 토론형식으로 논하던 것인데, 차츰 비현실적인 공론으로 기울었다.    <닫기> 

memo1.gif죽림칠현 竹林七賢

    중국 진(晉)나라 때에 서로 친교를 맺고 죽림에 모여 음주· 탄금(彈琴)하며 청담(淸談)을 나누었던 7명의 사람들. 완적(阮籍)· 혜강()·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怜)· 왕융(王戎)· 완함(阮咸)을 말한다. 위(魏)· 진(晋)의 양 왕조 교체기로 정변(政變)이 계속되던 당시의 귀족사회에서는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는 풍조가 생겼다. 7현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나, 그 생활방식은 각기 달리 하였다.
     산도와 왕융은 진나라 왕실을 섬겨 영달(榮達)하였고, 완적은 신중한 처세를 관철하면서도 즐겨 반(反)유교적인 언동을 취하였으며, 혜강은 관료사회의 허위성을 부정하고, 은자풍(隱者風)의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여 형사(刑死)하는 등 다채롭다. 그들의 공통점은 제약 속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닫기>  

memo1.gif신선사상 神仙思想

    인간이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닌 채 불로불사(不老不死)할 수 있다는 중국의 독특한 사상. 민간종교인 도교(道敎)의 기초개념의 하나로 BC 4세기경 발해 지방에서 일어났다. 바다 가운데 봉래(逢萊) 등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며 그곳에 백은(白銀)으로 만든 궁전이 있고 불로불사의 선인이 산다고 믿었다. 이것은 발해연안에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과, 중국 이외에도 8개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추연(鄒衍)의 구주설(九州說)이 결합되어 상립된 것으로 보인다. 한대(漢代) 이후 노력에 따라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강해져 이를 위한 신선술이 설명되었다. 이때 도가의 양생설(養生說)이 도입되어 도가의 시조(始祖) 노자(老子) 등이 선인으로 추앙되었다. 신선술은 진(晋)나라 갈홍(葛洪)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선약(仙藥)이 제일 중요시 되었고, 양생설에서 나온 호흡법· 방중술(房中術) 등은 보조수단으로 여겨졌다.    <닫기> 

memo1.gif강좌칠현 江左七賢

    고려 후기의 청담풍(淸談風)의 일곱 선비. 서로 의를 맺어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삼고, 시와 술을 즐긴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 항(皇甫 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를 가리킨다.    <닫기>

memo1.gif묵가 墨家

    제자백가의 한 파. BC 5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묵자(墨子)가 창시하였다. 당시의 지배적인 유교이념에 도전한 묵가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였고, 하늘 또는 상제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묵가사상은 차별 없는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맹자를 비롯한 유교사상가들의 공격을 받았다.    <닫기>

memo1.gif명가 名家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유파. 의미론을 연구하였던 고대 중국의 논리학파를 말하며 궤변론적 경향을 띤다. 변증논리를 연구하는 철학사조로 공손룡(公孫龍), 혜시(惠施)가 대표적 인물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사회의 변혁이 심하여 이름(名)과 실재(實)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명논쟁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가 논쟁의 초점이었으나, 전국 중기 이후에는 지식론· 논리학 방면으로 쟁점이 바뀌었다. 여기서 출현한 명가는 사물의 상대성과 개별· 보편의 두 측면에 대한 분석 등 논리적 사고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 분석과 논리는 궤변으로 타락하였다.    <닫기>

memo1.gif법가 法家 legalism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한 학파. 정치의 수단으로 법률·  형벌을 중시하였다. 이회(李浬)· 상앙· 신불해(申不害)· 신도(愼到)· 한비(韓非) 등이 주요 학자이다. 군권(君權)의 강화와 부국강병을 강조하고, 군주가 제정한 법률이 그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되며, 학문· 도덕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하에게는 엄격한 직책수행이 요구된다. 《한비자(韓非子)》 《상군서(商君書)》 등의 문헌이 있다.    <닫기>